글
살인자의 기억법(memory of a murderer, 2016)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린
살인자의 이야기.
독특한 발상, 흥미로운 주제다.
몇 년 전 소설로 먼저 접해보았고
소재와 몰입도 그리고 반전에 퍽 만족스럽게 읽은 작품이었던 만큼
영화화 얘기가 나왔던 때부터
과연 이를 어떻게 풀어낼지 하는 궁금증에
상당히 기다려왔던 영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인상적이었던 배우들의 연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적절한 유머코드,
원작 소설을 읽은 독자들을 향한 반전(...!?) 등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지나친 한국영화화(...)가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애초 잘 짜인 이야기인만큼
극 중반까지의 몰입도는 충분히 훌륭했다.
치매에 걸리면 흔히 어린아이와 같아진다고 한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차츰 본능만이 남게 되는.
한데 그 대상이 연쇄살인마라면?
참으로 발ㅊ... 아니 독특한 발상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마
그런 순간에도 남아있는 살인자로서의 본능.
그런데 영화 중반부가 지나면서
뭔가 묘해지기 시작했다.
원작을 통해서
애초 민태주(김남길)가 살인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며
마치 살인자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 김남길의 모습에
'이야, 원작소설을 미리 접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완전히 속겠구나.'
하고 내심 감탄하며 보고 있었는데...
...그렇다.
내가 속은 것이었다.
민태주는 실제로 살인자였고,
은희(설현)는 실제로 김병수(설경구)의 딸이었다.
감독의 의도야 알 수 없지만
원체 유명했던 원작소설이었던 만큼
관객들 중 다수가 이미 원작소설을 접했을 것이라 생각해서
오히려 역으로 반전을 준 것이었다면...!
하지만 이 때문에
전체적인 영화 구성이 너무 밋밋해져버렸다.
시종일관 수상했던 인물이
그냥 살인자였다. 하는
그리고 시작되는
한국판 '테이큰'.
현직 살인마의 손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전직 살인마의 이야기.
치매 걸린 70대 노인인 전직 살인마가
몸싸움을 통해 젊디젊은 현직 살인마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부성애 때문이었을까
혹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ㅂ...
거기다가 민태주가 여성들을 살해하게 된 동기에 대한 부분은
더욱 가관.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일화 때문이라는 진부한 설정으로
극중 누가 묻지도 않은 것을
본인 입으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목은
내가 다 민망해지는 장면이었다.
결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병수와 민태주가 동일 인물이었지 않겠냐는 얘긴
너무 터무니없는 만큼 논외로 치고,
김병수의 치매로 인한 것이냐,
혹은
2시간가량의 모든 러닝타임이 허구인 것이냐, 하는.
답은 감독만이 알고 있겠지만,
나로서는 전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자라고 하기엔 너무 억지스럽고, 개연성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그렇다면 민태주는 살인마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엔딩에서 그의 표정은 일관되게 서늘한,
살인자의 표정 그대로 이다.
극 중후반 김병수는 더 이상 자신을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살하고자 목에 주사바늘을 꽂으려는 찰나,
민태주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며 주사바능을 거두어들이는데,
같은 맥락으로써 엔딩에 그처럼 구성해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뭐 어디까지나 주관적 리뷰인 만큼...
배우 설경구.
연기력으로 익히 알려진 배우이나,
한편으론 늘 같은 연기, 뻔한 연기라는 비판도
함께 따라붙곤 했는데,
그랬던 이들도 아마 이 영화 속 그의 연기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 싶다.
눈빛과 표정, 몸짓, 눈가의 작은 떨림까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70대 연쇄살인마 김병수를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배우 김남길 역시
특유의 서늘한 눈빛, 미소 뒤에 숨겨진 칼날을
잘 발현해냈고,
많은 이들의 우려를 한 몸에 받았던
가수이자 배우 설현의 연기 역시
특별히 눈살 찌푸릴 부분 없이 나름대로 잘 스며들었지 않나 싶다.
원작을 배제하고 영화만 본다면,
좋은 소재이나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치곤
평이하고 잔잔한, 그리고 진부한 구성과 흐름.
하지만 배우의 연기가 충분한 몰입감을 주었던 영화.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다.
반드시 찾아볼 정도는 아니어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볼만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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